세월호 참사 유가족 침몰현장 방문 동행 취재

[뉴스워치=박선지 기자] 진도 앞바다 맹골수로에 들어서자 한 희생자 여학생의 아버지가 노란종이배를 바다에 띄운다. 그는 투박한 손으로 노란 종이배를 더 만들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또래 학생들을 싣고 뭍으로 올라오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종이배는 띄워지자마자 물거품 속으로 사라졌지만 아버지는 검푸른 바다 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오전 9시 구름이 낀 어두컴컴한 진도 팽목항. 세월호 희생자 가족 186명을 태운 한림페리 5호가 출항을 알리는 경적을 울렸다. 세월호 사고 이후 여객선을 처음 타는 가족들은 승선권과 신분증을 철저히 대조하는 모습에 달라진 작은 변화를 실감한다.

통로에서 서성이던 한 남성은 "거기 있지 말고 1층으로 내려가십시오”라는 안전요원의 말에 “선원 말 잘 들으면 물속에 들어갈 텐데”라며 낮은 목소리로 툴툴댔다. 구명조끼 위치를 알리는 안내방송도 못 미더워하는 반응이었다.

흐렸다 맑았다를 반복하는 날씨에도 바람은 대체로 잔잔한 편이라 갑판의 흔들림도 덜했다. 또다른 희생자 학생의 아버지는 "차라리 비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날씨가 좋은데도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 앞섰던 까닭이다. 그는 “피난처를 방불케 하는 객실에서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갑판 위로 나왔다”고 말했다.

발 아래 어린 딸이 아빠를 부르는 것 같아도 당장 뛰어들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은 아버지를 자책하게 했다.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실종자 수습’ 등 어느 하나 제대로 이뤄내지 못한 자책감도 끈질기게 상심을 짓누르고 있다.

1시간 40분 뒤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8㎞ 사고 해역에 도달했다. 묵념 뒤 가족들이 흰 국화꽃을 바다에 던졌다. 한 희생자 학생의 동생인 김모 군은 “엄마, 형 좀 안고 있어”라며 형의 영정사진을 건네자 어머니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기어코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낸다.

“○○야, 친구 다윤이 좀 보내줘”, “조금만 더 기다려줘, 곧 빼내줄게.”
배를 타고 가는 내내 말이 없던 가족들은 참았던 말을 내뱉으며 울먹였다.

갑판 난간에 올라 90까지 세던 어느 아버지는 “딸아이가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할거라고요!”라는 주변의 만류에 간신히 진정하고 내려섰다. 앞서 어느 엄마도 사고 해역에서 감정이 복받쳐 바다로 뛰어들려 했지만 동료 유가족들에 의해 가까스로 멈췄다.

유가족들을 태운 배는 30분 동안 사고 해역에 머무르다 침몰 지역을 알리는 부표 주위를 한바퀴 돌고 팽목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오전 11시20분 회항을 알리는 경적이 크게 울렸지만 자식·가족들을 떠나보낸 슬픔을 덮지는 못한채 상심의 바다를 뒤로 했다.

지난해 오늘 박청하 시사평론가가 자신의 칼럼에서 묘사한 싯귀가 떠올라 발길 돌리는 기자의 가슴을 먹먹히 때린다.

"밖에서 절대 힘들다 말하지 마라 / 안에서 절대 안 된다 말하지 마라 / 안 해서 안 되는 건 있어도 / 못해서 안 되는 일은 없나니 / 아들아, 딸들아 / 한번 들이킬 공기가 남아있는 한 /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 결코 생명의 끈을 놓지 마라 /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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