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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서 온 편지(33) 버마전선의 통곡 #2. 미찌나, 1943년 봄티처 정 / 미얀마 기독교엔지오 Mecc 고문
▲ 1945년 8월. 미국 전시정보국이 버마전선 조선인 위안부들을 심문하며 남긴 사진.

미찌나(Myitkyina). 미얀마 북부 까친주(Kachin State)의 한 도시입니다. 이곳에서 찍은 한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20여 명을 심문하면서 남긴 사진입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침통한 여인의 모습.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스무살이 채 되지 않는 얼굴도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 미국 전시정보국 심리전팀이 남긴 자료입니다.

미찌나는 일본군의 최전선입니다. 전투를 따라 이동해야 하는 위안부들이 가장 많이 있던 곳입니다. 위안부들은 태국의 ‘죽음의 철도’ 공사현장을 따라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을 따라 미얀마 북쪽으로도 이동했습니다. 양곤, 만덜레이, 그리고 북부 미찌나까지. 그들의 숙소도 발견되었습니다.

미얀마 지역은 3200여 명의 일본군 위안부가 소위 ‘집중파견’된 곳입니다. 최전선이기 때문입니다. 그중 2800여 명이 조선에서 온 여인들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들이 전쟁직후 다 어디로 갔는지, 그 생사의 흔적들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2800여 명의 조선 소녀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부산에 집결되어, 시모노세끼를 거쳐 이곳까지 왔습니다. 길고긴 항해입니다. 최전선인 미찌나의 위안부 중에는 조선인이 가장 많았습니다. 위안부에게도 그만큼 위험한 전선입니다. 북쪽으로 이동하며 군 주둔지가 세워지면, 그 옆에 군 위안소가 세워졌습니다. 마치 군 ‘보급품’처럼.

최근 기밀정보가 해제되고, 미군의 ‘일본군 포로심문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당시 버마전선의 위안부 실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실태를 조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모리카와 마치코.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란 책을 썼습니다. 버마에서 위안부로 있었던 문옥주 할머니의 이동루트를 따라 현지를 답사하고 추적한 내용입니다. 일본군의 공문서를 확인한 내용도 있습니다.

2005년에 그가 추가로 밝혀낸 자료에는 버마인 위안부들에 관한 내용도 담겨 있습니다. 버마내 남아있는 위안소 위치도 밝혀냈습니다. 미군의 심문 보고서들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미군 보고서에는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포로로 잡힌 일본군 18사단 소속 분대장 류 이츠시의 고백입니다.

‘1942년 랭군에 도착하여 모메익, 삐우린, 왈라우붐까지 갔다. 위안소는 군 주둔지의 주변 도시에 세워졌다. 일본군 위안부는 모두 조선인들이었다. 부대에선 위안부를 만나는 날짜가 정해지고 할당되었다. 위안부는 전투지대엔 파견되지 않았다. 그랬다면 위안부들은 성에 굶주린 군인들에게 아마 죽었을 것이다.’

또다른 일본인 이토 다카시의 취재기록입니다. ‘버마에 연행된 정송명(1924년생, 북한)씨는 등에 남은 칼자국을 보여주었다. 조선인 400여 명중 절반이 싱가포르에 하선하고 나머지는 랭군으로 왔다고 했다. 너무 피곤해 더 이상 군인들을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로 내리쳤다고 했다’ ‘성병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12명의 동료들이 도망쳤는데 이틀후 모두 붙잡혀 주모자가 나올 때까지 바늘달린 목판과 먹물로 문신을 새겼다’.

▲ 버마전선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이동하는 모습.

일본군이 위안부들에게 가한 행위는 더 이상 쓸 수가 없을 정도로 잔인합니다. 1942년 5월에서 8월까지 ‘4차 위안단’ 800여 명의 조선인이 랭군에 상륙한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조선인들의 생사와 귀국의 흔적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것과 관련된 증언과 기록입니다.

‘중국 운남성 송산 일대는 버마와 인접지역으로 마츠야마 군부대가 퇴각하며, 위안부들을 몰살시켰다’ ‘참호 속에 숨어 있던 위안부들에게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일본군의 철수 도중, 일본군 만행에 원한을 품은 원주민 게릴라들이 일본군과 함께 위안부들도 함께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 같이 이동했기 때문에 같은 적으로 간주되었다’. 또다른 증언도 많이 있습니다.

일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강제동원된 위안부는 약 2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2천명이 채 안되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집중파견’된 미얀마의 조선인 위안부는 전투 현장에 버려지거나 자결이 강요되고, 집단적으로 학살된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일본 강점기 3년간의 미얀마. 머나먼 ‘조선’에서 끌려온 12세에서 25세의 소녀들. 양곤과 만덜레이, 미찌나에 버려지고, 태국과 중국으로 퇴각하면서 일본군과 함께 죽은 영혼들. 거추장스럽다고 되레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어버린 영혼들. 살아남은 여인들의 그 기나긴 귀국여정과 평생의 슬픔들. 아직은 그 슬픔들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티처 정 프로필-----

강원도 삼척시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일요신문 사회부장
경향신문 기획팀장
MBN 투자회사 엔터비즈 대표이사
현 희망마을 사회적 협동조합 고문
현 미얀마 고아와 난민을 위한 기독교엔지오 Mecc 고문으로 양곤에서 근무
e-mail: mpr8882@hanmail.net

뉴스워치  webmaster@newswat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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