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가 꿈꿨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표지석.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할 말이 있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광해군으로부터 능지처참을 당하기 전에 외쳤던 말이다.

허난설헌 생가터. 솟을대문이 인상적이다

광해군의 측근으로 총애를 받았던 허균이 역모에 몰리면서 제대로 된 국문도 열리지 못한 채 죽어야 했고, 그는 외쳤지만 세상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강릉에 가면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이 있다. 이곳은 허균과 최고의 여류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허난설헌을 기념하기 위한 문학 공원이다.

허난설헌 생가터. 고즈넉한 분위기가 옛정취를 자아낸다.

허난설헌 생가터, 허균·헌나설헌 기념관, 전통차 체험관으로 이뤄졌다. 허난설헌 생가터에는 솟을대문이 있는 기와집이 눈에 띈다.

조선시대 당시 여인은 역사에 이름 석자를 남기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어울우동(일명 어우동)이나 명종 때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정난정, 숙종의 여인인 장옥정(장희빈) 등 자신의 이름을 남긴 여인은 드물다.

허균의 영정.

허난설헌으로 알려진 여인 허초희 역시 조선시대 이름을 남긴 극히 드문 여인 중 한명이다. 그만큼 허초희는 최고 여류 문인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허난설헌 생가터는 1983년 전국 시비 건립 동호회가 허균 3남매가 태어난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 교산(蛟山) 마을의 애일당(愛日堂) 터에 교산 시비를 세운 것을 시초가 됐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

1991년 강릉시 여성 단체 협의회가 난설헌 시비를 세우고, 1994년 강릉 예총에서 난설헌 시비 옆에 교산 문학비를 세우는 등 허씨 가족 5문장가의 시비를 세워 허균·허난설헌을 기리는 시금석을 다진 후 강릉시가 2001년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을 통해 본격적인 허균·허난설헌 선양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허난설헌 허초희 동상.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은 연면적 185.77㎡의 목조 한식 기와로 이루어진 단층 건물이다. 내부는 ㅁ자형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안내 데스크와 만나고 이어 주전시실(68.04㎡)과 소전시실(49.86㎡)로 이어진다.

초당순두부. 초당두부를 허균 아버지 허엽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전시품으로는 아버지 허엽(許曄)과 4자녀의 가계도, 허균 가족들의 작품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다.

이 기념관은 ‘초당’이라는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아버지 허엽의 호 ‘초당’에서 따왔다. 오늘날 초당두부가 탄생한 것도 허엽과 관련이 있다.

허난설헌 생가터. 허균과 허난설헌을 기념하는 각종 전시품이 있다.

허엽이 이곳에 살면서 관청 뜰에 있는 우물물로 콩을 삶고 끓인 콩물에 동해 바닷물을 넣어 응고시켜 만든 것이 ‘초당두부’의 기원이 됐다는 설이 있다.

물론 양반이 두부를 만들었다는 설 때문에 오늘날에는 허엽이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난설헌 생가터에 있는 나무.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에 가면 과연 남매는 조선시대 때 어떤 나라를 꿈꿨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특히 허균은 홍길동전을 통해 ‘율도국’을 꿈꿨던 인물인데 소설을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구현하려고 했을지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있는 여행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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