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따라 역사도 흐른다

금성관 제1관문 망화루.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전라남도 나주에 가면 나주읍성 고샅길이 있다. 고샅길은 마을의 좁은 길목을 일컫는 말인데 나주 고샅길은 나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금성관.

나주(羅州)는 작은 한양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한양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나주평야의 풍성한 곡물자원이 나주에서 모여 목포를 통해 일본으로 수탈되기도 하는 등 나주는 그야말로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다.

금성관.

나주는 고려 왕건이 지은 이름으로 당초에는 금성(錦城)이라고 불렀다. 금(錦)이 ‘비단’ 혹은 ‘아름답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기에 금성이라고 지었는지 알만하다.

금성관 뒷편

고려 왕건은 이 금성 지역을 차지하고 난 후 그물 라(羅)를 따서 나주로 불렀다.

정수루.

왕건과 나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911년 금성전투이다. 당시 왕건은 후고구려 궁예의 부하로 금성전투에 참가했는데 완사천이란 샘을 지나게 됐고, 왕건이 목이 마르자 한 처녀에게 물을 청했다. 이 처녀는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왕건에게 건네줬고, 이것이 인연이 돼 부부가 됐으며 처녀는 장화왕후가 됐고, 그녀의 아들은 고려 2대왕 혜종이 됐다.

나주목문화관.

나주가 중요한 지역인 이유는 후백제 견훤이 금성(나주)에서 발호해서 완산주(전주)를 점령한 후 후백제를 건국했다. 그리고 고려와 대적을 해서 고려를 위기에 빠뜨리는 등 후삼국 시대 당시 한반도에서 강대국이었다. 후백제 견훤이 이처럼 막강한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주의 풍부한 물자 때문이다.

나주목문화관 내부.

이런 풍부한 물자가 모이는 나주가 왜 작은 한양이라고 불렀는지 알만하다.

향토음식체험관.

나주 고샅길은 금성관을 시작으로 나주목사내아를 거쳐 나주 시내를 아우르는 길이다. 그 길에는 정수루, 나주향교 등 천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남고문.

고샅길은 ‘징검징검 서부길’과 ‘따릉따릉 동부길’로 나뉜다. 서부길은 3km 구간이며 동부길은 5km 구간이다. 전체를 다 둘러보는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박경중 가옥.

금성관은 조선 성종(1470년)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운 이후 나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객사다. 객사는 지방 궁궐이기에 중아에서 내려오는 관리나 외국사신들이 묵던 곳이다.

나주목사내아.

금성관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임에도 칸 간격이 넓고 높이가 일반 한옥보다 높아 정청으로서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나주목사내아 내부.

금성관 서쪽에는 정수루가 있다. 2층 누각 형태로 나주 관아의 정문에 해당한다. 정수루는 ‘관아에 출입할 때 의관을 바르게 하라’는 뜻이다.

나주목사내아는 조선시대 지방관이 머물던 안채를 의미하며 나주목사의 관사이다. ‘거문고 소리에 학이 춤추는 곳’이라는 뜻으로 ‘금학헌(琴鶴軒)’이라 불렸다. 현재 한옥체험 숙박시설로 활용중이다.

내아에는 오백년 넘는 세월 동안 터줏대감노릇을 하는 팽나무가 있다. 1980년대 태풍이 몰아치던 날 벼락을 맞아 두 쪽으로 갈라졌던 것을 황토로 봉합하고 지극정성으로 되살렸다.

나주읍성은 왜구의 침략이 잦으면서 한양도성과 같이 동서남북에 각각 문을 만들고 성내부에 길을 놓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사대문이 철거됐고, 1993년 남고문이 복원되면서 동점문, 서성문이 차례로 복원됐다.

나주읍성 고샅길은 그야말로 전라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시골길로 고즈넉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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