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통문 통해 근대 여성운동이 시작되고, 항일운동과 산업화 거쳐 민주화로

▲ 31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여권통문 발표 12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여권통문을 낭독하고 있다./사진제공=연합뉴스

[뉴스워치=강민수 기자] 9월 1일부터 경기도 고양시 국립여성사전시관에서 ‘오늘, 여권통문을 다시 펼치다’는 기획전이 5개월간 펼쳐진다. 이에 ‘여권통문(女權通文)’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여성운동의 시발점을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양반여성들이 이소사(李召史), 김소사(金召史)의 이름으로 ‘여학교 설시 통문(이하 여권통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 통문은 여성의 평등한 교육권, 정치참여권, 경제활동 참여권 등이 명시됐고, 당시 ‘황성신문’, ‘독립신문’ 등이 보도했다.

여권통문이 발표된 이후 근대적인 여성인권운동이 시작됐고, 그것이 일제 강점기, 해방기,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면서 오늘날 여성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개화기 여성운동으로 대변되는 여권통문

1876년 조선은 개항을 맞이하면서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유교사상에 입각한 전통적인 여성관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여성관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사상가들은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개신교 교사들에 의해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등 여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 양반여성들과 여성운동 찬동자 300명 정도가 ‘여학교 설시 통문’을 발표했다.

이 통문에는 문명 개화정치를 수행함에 있어 여성들도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과 여성들도 남성과 평등하게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고, 여성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여권통문은 최초 한국여성인권선언서로 의미를 가지며 여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조직된 찬양회는 최초 여성단체로 기록된다.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며 단순히 주장이 아닌 여학교 설치 등 실천적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일제 강점기,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분화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발현된 원인도 개화기 때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한 교육이 토대가 됐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해 쌀이나 패물을 모으는 등 국채보상을 통해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고자 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병탄했고, 1919년 3·1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신교육을 받은 지식여성인들 중심으로 억압된 여성의 삶과 일제로부터 해방을 외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20년대 기독교계 여학교 중심으로 여성계몽운동에 들어갔으며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와 조선여자교육회가 여성계몽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신여성은 서양 여성해방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유연애와 정조관염의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아울러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됐다. 1923년 7월 경성고무공장 파업은 여성 노동자들의 대표적인 투쟁 사례로 오늘날에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일부 여성들은 만주 등 해외로 나아가 무장독립투쟁에 가담하거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지원하는 등 여성인권 신장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다.

해방 이후 여성노동운동과 여성운동으로 분화

해방을 맞이한 조국에서 여성들은 여성노동운동과 여성운동으로 분화가 됐다. 여성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를 했다. 이들은 남성들과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요구했고, 생리휴가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이르러 동일방직사건, YH사건 같은 여성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이 격화되면서 민주화운동과 맞물리게 됐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여성노동자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동자대투쟁 등이 이어지면서 오늘날 여성노동운동을 이끌어오고 있다.

아울러 민족주의계 여성운동가들은 여성단체를 모집해 여성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정치에 깊숙이 개입 함으로써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1970년대 들어와서 본격적인 여성대중운동이 전개됐고 그 중심에는 교회여성운동이 있었다.

1980년대 들어서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고, 1983년의 여성평우회를 비롯해 여성의 전화, 민청련 여성부, 또하나의 문화 등 새로운 조직들이 결성됐다.

1985년 일명 이경숙 사건을 전개하면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하게 됐고, 가족법과 남녀고용평등법의 개정, 영유아보육법 제정이라는 성과를 가져왔다.

1990년대 여성운동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성폭력상담소 등을 결성했고, 반전·반핵 평화운동을 전개했으며 통일을 위한 남북여성 공동대응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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