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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따라잡기] 익산 쌍릉은 백제 무왕 무덤?..누구기에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 실존인물 여부는 논란 속으로
   
▲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인골 분석 결과 발표 기자간담회에 3D복제뼈(왼쪽)와 실제 발굴뼈가 전시되고 있다./사진제공=연합뉴스

[뉴스워치=강민수 기자] 전라북도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인골이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백제 무왕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4월 익산 쌍릉(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이 7세기에 사망한 노년 남성이라는 분석결과를 18일 내놓았다.

그런데 인골의 병리학적 특징이 당시 무왕을 묘사한 기록과 상당부분 겹친다는 것이다. 그동안 대왕릉과 소왕릉은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설이 전해졌다.

또한 대왕릉이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것이 역사 학계에서는 유력하게 이야기가 돼 왔다. 그런데 이번 인골 분석 결과 백제 무왕일 가능성에 한발짝 다가선 셈이다.

102개 인골조각, 그는 누구인가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8월부터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 중 하나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여구소, 익산시와 공동으로 쌍릉 발굴조사를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102개 인골 조각이 담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이에 문화재연구소는 이 인골이 백제 무왕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전문가를 모두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의 수종 등을 정밀분석했다.

이에 성별은 남성으로 판단됐고, 키는 161~170cm로 추정됐다. 삼국사기에 무왕은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묘사돼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상당히 큰 키(당시 170cm이면 상당히 큰 키다)의 인골 조각은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나이는 최소 50대 이상이고, 620~659년으로 산출되면서 7세기 초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벼, 코리, 콩, 어패류 등을 섭취한 것으로 확인했다.

이에 600년에 즉윙해 641년에 사망했다는 백제 무왕의 기록에 따라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판단했다.

백제 무왕, 그는 누구

백제 무왕은 제30대 국왕이다. 그 다음 왕은 ‘의자왕’이다. 이름은 부여장(扶餘 璋)이고 아명은 서동(薯童) 혹은 일기사덕(一耆篩德)이다.

재위 기간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는 한편, 동아시아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세력 균형과 중립외교를 통해 실리정책을 펼쳤다.

630년 사비궁을 중수했으며 익산에 동방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했다. 그리고 익산으로 천도도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왕의 출생 및 가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고 사서(史書)마다 다르게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했고 ‘삼국유사’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다. 삼국유사에는 무왕의 어머니가 검은 용과 통정을 해서 무왕을 낳았다고 기록했다.

서동 설화, 선화공주는 실존 인물일까

삼국유사에는 서동 설화 이야기를 싣고 있다. 서동 출신인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편에는 서동(백제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들어가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서동요는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짝을 맞추어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를 들은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멀리 귀양을 보내게 되는데 서동을 도중에 만나고 서로 사랑을 나누게 됐다는 이야기다.

익산 미륵사를 최근까지만 해도 선화공주가 중심이 돼서 창건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삼국유사 기록에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던 중, 용화사 아래 큰 연못에 이르렀는데 미륵삼존이 연못에 나타나자 왕은 수레를 멈추게 하고 경의를 표했다.

이때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고 이야기를 했고, 이에 미륵사가 창건됐다는 이야기다.

백제 무왕의 부인이 당연히 선화공주라고 생각한 역사학자들은 미륵사를 선화공주가 창건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석탄 해체 과정 중 금동사리함 명문이 발견됐다. 이 명문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백제 대귀족)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적혀 있다.

즉, 석탑 준공 당시에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후라는 것이 확인됐다.

이에 일부 역사학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은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주장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백제와 신라는 전쟁을 하는 관계인데 혼인동맹이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미륵사 창건을 막 시작할 당시(600년)에는 선화공주였을 지도 모르지만 그 사이 선화공주는 사망하고, 창건을 끝마치고 금동사리함 명문을 만든 시점(639년)에는 사택왕후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백제 왕들이 일반적으로 2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선화공주도 왕비이고, 사택왕후도 왕비라는 설도 제기하고 있다.

강민수 기자  newswatch@newswat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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