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처 정 / 미얀마 기독교엔지오 Mecc 고문

▲ 영화 '쉘위댄스'의 한 장면

왈츠나 탱고 같은 댄스를 출 때 홀딩(holding)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잡다, 껴안다’라는 뜻이죠. 홀딩 자세가 바로 잡혀야 춤이 됩니다. 부부간에 댄스스포츠를 배우는 사람들이 늘지만 홀딩자세가 좋지않으면 서로 편하지 않아 싸우기도 합니다. 홀딩은 남자 쪽에서 리딩해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부부간의 홀딩. 부부간의 로맨스. 부부의 사랑은 플로어를 헤치고 추는 춤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아웅산 수치 여사

부부간에도, 아름답지만 고통스런 로맨스들이 있습니다. 그 로맨스를 생각하면 두 사람의 주인공이 떠오릅니다. 한사람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여사의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 또 한사람은 저희 동네에 살던 평범한 남자입니다.

수치여사의 삶은 평범하지 않지만 결혼생활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암살당하고 열여섯살에 어머니를 따라 인도 뉴델리에 살다가, 영국 런던으로, 미국 뉴욕으로, 결혼해서는 부탄에서, 네팔에서 다시 영국으로. 조국을 떠나 떠돌이처럼 살았습니다. 게다가 노벨평화상은 가택연금 상태라 수상식에 아들을 보냈고, 남편의 장례식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남편 마이클은 영국의 가난하고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와 그녀가 결혼하기 전, 뉴욕과 영국에서 나눈 2백여통의 편지에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녀는 “저와 제 조국 사이를 가로막지 말아주세요”라는 간절한 거절도 들어있지요. 하지만 그는 그녀의 요구사항을 다 받아들이고 결혼했고 죽을 때까지 그녀를 위해 헌신적으로 산 게 드러났습니다. 평범하게 살길 원했던 그녀에게 용기를 준 사람입니다. 그가 죽고 그녀가 그리워한 게 홀딩입니다. 자기 발이 차서 남편의 발을 홀딩하고 싶다고.

십여년 전 저희 아파트에 한 분이 살았습니다. 그분은 아내가 심한 당뇨에 걸려 집안에 어둠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 있었지요. 집안일도 남편이 해야하고 수발도 들어주어야 하고 회사도 가야 하고. 하지만 헌신적으로 아내를 보살펴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댄스를 배우기로 했다’는 겁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답게 ‘좀더 밝게, 좀더 활기차게 살아야겠다’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왈츠, 탱고 이런 거 들어봤어? 쉘 위 댄스 영화 같은거야.

부부는 일주일에 서너차례, 저녁에 댄스스포츠를 하고 땀을 뻘뻘 흘리고 돌아오는데 부인 얼굴이 많이 밝아진 것 같았습니다. 한해가 지나고, 두해가 되던 날. 부부가 놀러왔습니다. 며칠후에 자기네가 발표회를 갖는다는 겁니다. 결혼 25주년 기념 작품발표회라 하이얏트호텔의 홀을 빌려서 하는데 초대 팜플렛에 들어가는 시를 써달라는 겁니다. 저는 춤도 모르는데.

며칠 고민고민하다 그 부부의 고통스럽지만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하며 쓴 시입니다. 제목은 <그대에게 가는 여행>입니다.

아내여, 우리가 두개의 물방울로 만나/ 가파른 계곡과 길고 긴 강을 거쳐/ 마침내 먼 바다의 기슭에 당도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의 물방울로 합쳐 굴렀기 때문입니다./ 아내여, 세상의 불빛이 명멸하던 수많았던 밤/ 세상에 떠밀린 지친 어깨로/ 컴컴한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었던 까닭은/ 돌아가야 할 집에 당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여, 우리에게 삶의 장애물이 닥칠 때마다/ 당신에게 받아야 할 것들만 생각하며 내가 불행했던 까닭은/ 내게 주어야 할 것들만 생각하며 행복했던/ 당신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대여, 당신을 만나고부터/ 가슴에 비 내리고 모래바람이 눈을 찌를 때도 있었으나/ 우리가 여행을 멈출 수 없었던 까닭은/ 어제의 눈물도 모두가 물방울처럼 하나가 되어/ 언젠가는 푸르른 바다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대여, 당신의 늦은 귀가길,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수없이 쓴 애증의 편지를 끝내 부치지 못한 까닭은/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고 사는 일이 더 괴롭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대여, 세상의 시련 속에서/ 당신이 울음을 참고 있을 때/ 당신의 손을 가만히 잡고만 있었던 까닭은/ 사랑도 슬픈 음률의 댄스와 같아서/ 혼자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혼자 지나치면 춤이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밤과 낮, 홀로 있을 때마다/ 내 마음속을 걸어오던 당신이여/ 우리의 먼 여행은/ 바로 옆, 당신에게 가기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두개의 물방울이 하나로 흐르듯/ 그대의 사랑이 내게로 흐르듯/ 나도 그대에게 촉촉이 스며들고 싶습니다.

작품발표회에 가니 첫순서에 시낭송이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남녀 아나운서가 교대로 시를 읽으며 남편은 웃고 아내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 부부의 발표회를 보고 제가 댄스를 3년이나 했습니다. 그 부부와 대회도 나갔습니다.

댄스의 추억이 그립습니다. 왈츠의 리듬으로 오라 내 사랑하는 이여, 이 봄날에. 눈감으면 떠오르는 너와 나의 홀딩.

 

----티처 정 프로필-----

강원도 삼척시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일요신문 사회부장
경향신문 기획팀장
MBN 투자회사 엔터비즈 대표이사
현 희망마을 사회적 협동조합 고문
현 미얀마 고아와 난민을 위한 기독교엔지오 Mecc 고문으로 양곤에서 근무
e-mail: mpr88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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