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뉴스워치] 2017년 8월부터 지난 5월까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은 19만 건을 넘어선다. 한 달 평균 2만여 건으로, 하루 평균 680여 건의 청원글이 올라온 셈이다. 그들은 왜 청원글을 통해 국민의 동의를 얻으려 하고 정부의 답을 구하고자 하는 걸까. 무엇보다, 청원자들이 글을 올리는 진짜 이유는 뭘까.

억울해서, 화가 나서, 나라를 생각하는 진지한 마음으로 등 다양한 이유가 바탕이 될 테지만 이들 청원글이 주목받는 공통점은 하나다.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정도, 그리고 공감대의 정도다. 그리고 그 조건을 부합하기 위해서는 ‘분노’라는 감정이 필요하다. 여론의 공분을 일으키는 정도가 미디어 노출을 결정하고, 청와대 답변 기준인 20만 공감을 얻는다는 것이 심리학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한 심리센터 원장은 국민청원의 활성화 뒤 여론의 심리에 대해 “약자에 대한 동정심의 측면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강자에 대한 분노가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약자가 이렇게 피해를 받았는데 사회가 무관심하니 도움을 달라’는 것보다 약자에 피해를 입히는 기성세력과 조직에 대한 처벌을 원하는 마음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청원글을 올리고 이에 동의하는 심리를 청원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공감보다는 분노의 집단 투사로 봤다.

물론 분노란 감정은 여론심리의 극히 일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분노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특히, 과연 분노는 미래 지향적 행동일 수 있을까?

세계적으로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여성학자인 마사 C. 누스바움 미국 시카고대 철학부 교수가 신간 ‘분노와 용서’로 독자들에 이같은 질문을 던진다.

누스바움 교수는 2014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진행한 ‘존 로크 강좌’ 강의록을 바탕으로 펴낸 이 책을 통해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한다. 눈에는 눈을 고집하면 그 결과는 결국 온 세상의 눈이 멀게 되는 것이라고.

저자는 가족과 같은 친밀한 관계, 직장 동료나 상사와 맺는 ‘중간 영역’ 등 일상적 분노의 영역과 함께 정치적 영역까지, 세 가지 영역에서 분노를 들여다보고 분석한다. 그의 주장은 한결같다. 모든 영역에서 분노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 차라리 분노를 유발하는 원인과 거리를 두거나 냉정하게 법적 대응을 모색하는 편이 효과적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특히 저자는 “분노가 일어나게 된 계기의 가치를 존중하는 한 적절한 감정이 될 수 있지만, 지위에 집착하고 피해를 갚아주겠다는 소망을 품으면 문제가 된다”면서 “분노가 던지는 미끼를 물고 공상적 응징으로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무엇보다 여론의 공분을 사기 쉬운 지위에 기반을 둔 분노에도 주목한다. 굳이 “국민은 개 돼지” “국민은 레밍” 등 공분을 샀던 공직자와 정치인의 코멘트가 아니더라도, 최근 각종 물의가 폭로된 한진 일가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지위를 기반에 둔 분노는 상대를 비천하고 저열한 존재로 만든다. 이는 혐오로 연결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각종 혐오는 결국 ‘우리는 너희보다 낫다’는 정서적 계급 차별로 이어진다.

다만 저자는 분노의 선한 대안으로 용서를 말하는 데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는 용서를 조건부 용서, 무조건적 용서, 무조건적 사랑으로 구분하고 조건부 용서는 부당행위를 당한 사람이 잘못된 사람의 치욕을 기뻐한다는 점에서, 무조건적 용서 또한 용서하는 주체가 도덕적 우월감을 풍긴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나선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사회가 부정하고 타락해 법적 대응이 불가능할 경우’에서도 피해 사실을 공인하고 다시는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그 예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언급한다. 흑인을 괴롭히는 백인이 고통받길 바라거나 백인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인종 차별이라는 체제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 분노를 내려놓고 사회적 제도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원론적인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국민청원이나, 혐오를 저변으로 한 갑질에 대한 원성 등 여론의 분노 역시 지극히 합당한 심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저자의 조언을 따를 때 사회는 조금 더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고와 개선을 거듭해 나갈 수 있다.

저자가 이끄는 분노와 용서의 세계로 나아가기에는 아직 만연한 이 사회의 무질서가 분노를 억누를 수 없게 한다. 그래서 그 세계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적 제도의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련의 사건과 피해자의 억울한 심리에 공감하고 공분해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순히 분노풀이와 감정풀이로 귀결되기보다는 제도적 개선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인천 초등생 살인사건, 부산 여중생 폭행을 거치며 등장한 소년법 개정이나, 창원 유치원생 성폭행 및 최근 알려진 경기북부 학원 여강사의 초등생 성폭행 사건에 대한 미성년자 성폭행범 처벌강화 요구 등이 올바른 예라 하겠다.

다소 원론적이고 현실적이지 못한 조언과 지적이 있긴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분노와 용서에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현실 가능’한 소망이 담겨 있다. 그토록 거창하게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다음의 문구는 쉽게 끓어오르고 분노하는 요즘의 사람들에게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분노가 문제적인 이유는 피해를 갚아주겠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 이 소망은 분노라는 개념에 내포되어 있죠(이행-분노라는 경계선상의 드문 사례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에는 분노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한 방편이 되어준다는 게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입니다. 분노라는 감정의 강렬함과 거기에 깃들어 있는 인과응보의 마법적 공상은 분노하지 않는 한 아예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았을 법한 사람들도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분노라는 신호가 없으면 부당행위의 존재나 그 규모를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는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해결되는 일이 많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분노가 던지는 미끼를 물고 공상적 응징으로까지 나아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 (97쪽)”

문서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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