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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돋보기] 영주 선비촌 & 소수서원
   
 

[뉴스워치=어기선 기자] 영주 선비촌은 유교문화 발상의 중심지인 연주에서 옛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선현들의 학문 탐구와 전통생활 모습의 재현을 하고자 만든 장소이다.

부지면적은 5만 7717㎡(1만 7460평)으로 전시가옥 면적은 2651㎡(802평)이고, 주요 전시가옥은 와가 7가구, 초가 5가구, 누각 1동, 정사 2동, 정려각 2동, 성황당 1동, 곳집 1동, 원두막 1동, 저자거리 등이다.

선비촌은 소수서원과 연계되면서 영주 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그리고 역사관 확립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상진家, 해우당고택, 강학당 ‘수신제가(修身齊家)’란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올바르게 가꾼다는 뜻이다.

선비들은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학문을 힘쓰며 일상의 생활윤리를 실천하는 일, 곧 수신(修身)을 중요시했다.

이는 유학의 실천적인 학풍에 의한 것으로 선비들은 수신을 위해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공부하고 바르게 실천하는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신제가의 공간에서는 자기수양을 위해 노력했던 영주 선비의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교육방식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두암고택, 인동장씨종가 ‘입신양명(立身揚名)’이란 사회에 진출하여 이름을 드높인다는 뜻이다.

옛 선비들에게 과거시험을 통한 관료의 길은 수신제가(修身齊家)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즉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얻는 일이었다.

입신양명의 공간에서는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다양한 활동을 했던 영주 선비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도록 했다.

김문기家, 만죽재, 정사 ‘거무구안(居無求安)’이란 사는데 있어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살아갈 길을 고민했다.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는 것을 인격수양의 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무구안의 공간에서는 명상과 풍류를 즐기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 하지 않고 현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영주 선비의 굳은 기개를 엿볼 수 있도록 했다.

김세기家, 김뢰진家, 장휘덕家. 이후남家, 김규진家, 두암고택가람집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란 가난함 속에서도 바른 삶을 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비록 살림살이가 어렵더라도 잘사는 것에 욕심이 나서 선비의 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곤궁함으로 인해 가볍게 스스로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우도불우빈의 공간에서는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소수서원은 사적 제55호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만든 일종의 사립학교이다. 세종대 설립됐다는 기록도 있지만 풍기군수 주세붕이 풍기지방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을 배향하는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였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해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됐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됐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어기선 기자  newswatch@newswatc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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