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워치=어기선 기자] 김영랑 생가는 우리나라 대표 서정시인이자 항일 민족지사였던 영랑 김윤식 선생의 생가이다. 김윤식 선생은 이곳에서 1903년 1월 16일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3월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상경해서 기독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한 후 휘문의숙에 진학했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이던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 넣고 강진으로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에서 수학한 선생은 용아 박용철 선샌 등과 친굘르 맺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 후 귀국해서 시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영랑 선생은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더불어 우리 현대시의 새 장을 열었다.

1934년 4월 ‘문학’지 제3호에 불후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했으며, 1935년 ‘영랑시집’을, 1949년 ‘영랑시선’을 출간했다.

선생은 조국 해방이 이뤄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 채 흠결 없는 ‘대조선인’으로 외롭고 의롭게 살았다.

광복후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부상당해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영랑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몇 차례 전매됐으나 1985년 12월 강진군이 매입했고, 1986년 2월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으며, 2007년 10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했다.

원래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지붕을 시멘트기와로 보수했으며, 기단부와 벽체는 시멘트로 발라 원형을 잃어버렸다. 강진군청에서는 김영랑 생가 복원을 위해 생가를 사들이고 초가집 원형으로 복원했다.

현재 본채와 사랑채 2동만 남아있고, 주변에는 모란밭이 조성돼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초가지붕이다. 사랑채는 본채에서 10여m 떨어진 왼쪽에 있으며 우물도 있다.

집 뒤편에는 장독대가 놓여 있고 언덕에는 오래된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1986년 2월 17일 전라남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가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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